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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대성동 자유의 마을’ <디펜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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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국방 전문 월간지 <디펜스21+> 2014년 6월호에 대성동에 관한 기사를 썼습니다. ‘세월호’ 침몰 사건과 관련해 표지는 물론 전반적인 내용도 무거울 수 밖에 없던 달이었지만, 감사하게도 <디펜스21+>에서 대성동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디펜스21+>는 군사전문지라서 대성동 기사 내용도 유엔군사령부와 그 관리 하의 규정 위주로 쓰면서 몇 가지 에피소드를 섞어 구성했습니다.

대성동은 정말 특별한 곳입니다. 스스로도 이미 감사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자라면서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유별난 사건들은 제게 잊을 수 없는 유년시절의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대성동 마을이 담고 있는 분단 이야기와 대성동에서 자란 제가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고민들은 앞으로 잘 엮어 여기 ‘강냉이네’에 올릴 예정입니다. 계속해서 지켜봐 주세요.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남과 북으로 각각 2km,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설정된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이곳에 유일하게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하나 있다. 필자의 고향인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다. 50가구 이내, 주민 수 200명도 안되는 작은 마을 대성동은 평범한 시골 마을 같지만, 그 이면에서 종종 분단된 한국의 불안정하고 모순된 상황들이 발견되곤 한다.”

 

 

정전협정에 보장된 마을

강릉 김씨 집성촌이었던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대성동’으로 한국전쟁 이전에는 행정구역상 경기도 장단군에 속했다. 대성동은 주민 대부분이 농업을 생업으로 하여 살던 벽촌 마을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주민들 일부는 피난을 가기도 했지만, 임진강을 건널 수 없었던 주민 대부분은 마을에 남아있게 됐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되며 비무장지대 내의 민간인은 모두 소거됐으나, 부칙에서 “남북이 각각 안쪽에 마을을 하나씩 둔다”는 조항을 통해 대성동 주민들의 거주가 허용됐다. 직후인 8월 3일 대성동은 ‘자유의 마을’이라는 새로운 이름과 함께 비무장지대 내의 유일한 민간인 마을로 자리잡게 된다. 주민권은 한국전쟁 이전에 판문리 일대에서 거주했던 주민 또는 그들의 직계 자손에 한해 주어졌고 대부분이 대성동 주민이었다.

비무장지대 설정으로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게 됐지만 구역 내에서는 명확하게 남북의 경계를 나타내는 물리적 구분선이 없었다. 실제로 마을 밖에서 영농작업을 하다 북한군을 마주치는 일이 이따금 발생했으며, 한국전쟁 이전에 결혼 등으로 대성동에 이주한 주민들의 경우 고향으로 다시 보내져 첩보 활동을 요구당한 사례도 있었다.

전쟁의 직접적 피해는 남북간의 적대관계가 해소됨에 따라 대부분 사라졌고, 대성동은 여느 조용한 시골 마을과 다름없는 모습을 갖게 되었다. 어느쪽으로부터 오든 도발에 잇따르는 군사적 긴장은 여전히 있지만, 그렇다고 주민들의 마음속에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나 피해의식이 유별난 것은 전혀 아니다. 남북관계에 관한 한 오히려 외부에서 더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긴장상황도 능숙하게 받아들이고, 당황하지 않으면서 분단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편이다.

 

한반도의 한 중간, 그러나 유엔사가 관리

비무장지대 관할권은 한국 정부가 아닌 유엔군사령부(이하 유엔사)에 있다. 정전협정 제 1조 10항에는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 이남 부분에 있어서의 민사 행정 및 구제사업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책임진다”고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정전협정 체결 당시 당사국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한국 정부는 영토인 한반도의 한중간에 위치한 비무장지대에서 주권을 행사할 권리가 없다.

유엔사는 정전협정 준수를 감독하는 군사정전위원회(이하 군정위)와 대성동이 포함된 판문점 주변의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 경비대대를 지휘하며, 유엔사 사령관은 주한미군사령관과 한미연합사령관의 직위를 겸한다. 대성동 마을에는 JSA경비대대의 민정중대가 파견되어 민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대성동 주민의 비무장지대 출입 및 모든 생활 역시 미군이 전신인 유엔사가 정전협정에 따라 관리한다. 주민들은 출입시 통행증을 항상 소지해야 하고, 마을로 이어지는 유일한 도로인 1번국도 이용시에는 등록된 주민 차량만이 통행 가능하며 이를 증명하는 깃발을 내걸어야 한다. 모든 통행증과 깃발 등에는 유엔 마크만이 그려져 있지만 부대 내 국기게양대에는 태극기와 유엔기 외에도 성조기가 함께 올라가 있다.

대성동 주민은 영농활동에 필요한 경우 혹은 친척이나 친지 초청 시 방문을 요청할 수 있지만 인원이 제한되어 있으며, 경찰서의 신원조회를 거친 후 반드시 마을 대표인 이장과 군정위의 방문 허가를 받아야 한다. 방문자의 행동반경은 마을을 벗어날 수 없으며 방문시에는 경비대대에서 제공하는 경비병의 에스코트를 받는 동시에 안전에 우려가 있거나 북을 도발할 위험이 있는 행동을 하는지 감시받는다.

이밖에도 민간업체에 의한 측량조사가 실시될 수 없는 대성동 마을과 주변 지역은 국내 지도는 물론 자동차 네비게이션에도 정보가 뜨지 않는다. 필자가 집으로 가는 길에도 민간인 통제선을 넘어 대성동을 향해 가다 보면 네비게이션은 공백으로 바뀐다. 휴대전화가 상용화된 이후에도 기지국 설치가 불가능해 2000 년대 초반까지도 대성동 내에서 휴대전화는 무용지물이었다. 휴대전화 기지국 같이 생활에 필수적인 부분은 적극 나서서 유엔사 협조를 요청했지만, 네비게이션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아 동네 안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경비대대는 마을에 대한 일상적인 경호 지원과 필요시 구호활동 등을 담당하며 대체로 주민과 협력한다. 특히 민정중대는 정전협정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주민들의 원활한 생활이 유지되도록 돕지만 주민의 생활은 결코 정전협정에 우선하지 못한다. 이를 판단하는 기준이 모호할 때에는 주민생활이 제약을 받는 경우도 있다.

 

주민의 삶을 정의하는 헌법 이외의 규정

주민들의 생활 규정은 ‘대성동 민사예규’를 통해 보다 자세하게 정리돼 있으며, 주민들은 정전협정은 물론 지역 자체 경계와도 밀접하게 연관된 해당 규정을 엄수할 의무를 지닌다. 헌법 이외의 자체 규정이 별개로 있는 셈이다. 이는 주민들의 삶에 특혜와 제한을 동시에 주고 있다.

헌법과 교차하는 부분 중 몇 가지 소개하자면 먼저 대성동 주민들은 민사예규에 의거, 지방세 납부와 병역 의무를 면제받는다. 일부 국민들은 의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으나 특히 군면제의 경우 이는 마을 내에서의 생계수단이 농업으로 한정되어 있고 마을 조성 당시 160명이었던 주민들에게 주어진 거주권이 현재까지도 직계자손에 한해서만 부여되는 점을 고려할 때, 젊은 사람들이 군대에 가게 되면 마을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생긴 조항이다. 그러나 민사예규와는 별개로 민정중대와 마을 주민이 총동원돼 비상 대피 훈련을 하거나, 군복무를 면제받은 남성들도 일정한 시기가 되면 JSA 경비대대로부터 사격 등의 군사훈련을 받았다.

게다가 비무장지대 내의 토지는 미수복지역에 속하기 때문에, 소유권은 인정되지 않고 경작권의 양도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양도 역시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그 내용은 예규에 포함되어 있다. 마을의 대표 생계수단인 토지 문제도 이처럼 불안한 상황이지만, 삶의 터전이었던 대성동 마을을 쉽게 떠날 수 없는 주민들의 사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민권이다. 주민권은 결혼 및 자녀 출생 등으로만 획득 가능하며 장기외부체류 등의 사유로 소유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상실할 수도 있다. 영농시간 미준수나 통행증 미소지 등 규정 위반 사유는 처벌규정에 따라 경고를 받거나 일정기간 동안 마을에서 추방, 최악의 경우 주민권 상실 등의 조치가 따른다. 외국 영주권과 비슷한 개념이나 획득과 유지는 훨씬 까다롭고 제한적이다.

이 때문인지 일각에서는 대성동 주민들에게 대한민국의 법률적 통제를 가하기 위해서는 유엔사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대성동 민사예규’에는 “대한민국 법률은 대성동 주민 및 대성동에 출입하는 모든 인원에게 적용”되며 “법률을 위반한 자는 관계기관에 즉시 이첩한다”고 정확히 명시되어 있다. 마을 자체가 50가구 이내의 작은 공동체이기 때문에 범법행위 발생시 법률적 조치는 물론 삶의 터전인 마을 안에서의 생활 유지가 힘들어진다. 원래도 대성동에는 담장이 없고 주민들은 대부분 문을 잠그지 않고 생활한다.

이 밖에도 주민들은 밤 11시를 지나면 일출 전까지 외부 출입은 물론 동네 안에서도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다. 11시 전에도 일몰이 지난 시각에는 일정 시간마다 제공되는 군 경호차량을 통해서만 외부 출입이 가능하다. 시내에서 친구들과 한 잔 하다 11시를 넘기면 그날은 밖에서 지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예규에서는 관광을 목적으로 한 외부인 방문을 불허한다. 거주지이자 일터인 마을에서 주민의 프라이버시를 보호를 위해서인 동시에 비무장지대 내에서 농토이용 이외의 이익창출 활동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안한 긴장상태의 유지

대성동을 비롯한 비무장지대 내의 활동은 정전협정에 따라 도발을 최소화하는데 모든 초점이 맞춰진다. 이렇게 불안하지만 일정한 긴장상태가 늘 유지되는 이곳도 한편으로는 북미관계나 남북관계, 보수단체의 대북활동 등 다양한 외부요인에 의한 부침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특히 보수단체가 봄만 되면 살포하는 전단 때문에 마찰이 생기면 한창 모내기를 할 시기임에도 영농활동이 금지되고 주민들은 집에서 대기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곤 한다. 판문점에서 회담이 있거나 미국 정치인들이 방문할 경우에는 관계자들의 1번 국도 이용을 위해 주민들의 출입이 일정시간 통제되기도 한다.

한번은 마을 이장이 경기도로부터 지원을 받아 마을 전망대에 방탄유리를 설치한 적이 있었다. 연평도 포격 사태가 있은 후 대성동 주민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상황을 우려했던 당시 이장이 직접 요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안 군정위에서는 기겁을 했다. DMZ 안에서 군사시설도 아닌 민간인 마을에 방탄유리를 설치했다는 사실이 북한에게는 도발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장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다수의 주민들은 이로 인해 한동안 더욱 엄격해진 군정위의 통제를 따라야 했다.

이런 역사를 돌아볼 때 개성공단 설립은 다소 신선한 변화였다. 유엔사가 주관하는 판문점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교류하는 남과 북을 처음 목격한 것이었다. 또한 개성공단이 생기기 이전에는 보안상 이유로 금지되었던 ‘일몰 후 1번국도에서의 전조등 이용’이 허가됐다. 개성공단에서 나오는 조명들로 그 일대가 훤히 드러났기 때문에 금지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북간의 긴장 완화가 눈에 보이고 느껴지던 시기였다. 그런 점에서 2013년 공단 폐쇄 사태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2004년을 기점으로 JSA 경비책임은 유엔사에서 한국군 제 1사단 경비대대로 이양됐지만 군정위를 비롯한 핵심 참모들은 여전히 미군 소속이다. 실제 업무를 이행하는 병사들과 이를 관리하는 상부는 한국군이나, 비무장지대 내에서의 활동에 대한 권한은 아직도 군정위가 결정하는 가운데 주민들의 활동에는 제약이 늘어난 편이다. 시골이다 보니 도로정비나 농업용 공사, 기계 설치 등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왕왕 있는데, 방문 요청이 쉽게 허가가 나지 않거나 허가를 받아도 지원이 수월하게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미군이든 한국군이든 한쪽에서 관리와 업무를 전담할 때 동네 주민들의 삶과 관련된 업무 처리가 훨씬 수월했다는 의견도 있다.

 

국내에서는 미군 철수나 전작권 환수 문제로 많은 논란이 있지만, 대성동 주민들은 정전협정과 유엔사가 그대로 있는 한 마을 안에서의 삶도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분단관계가 불러오는 불편함과 긴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익숙하지만, 삶의 유지가 불안정해질 때는 주민들도 우려가 늘어날 것이다. 다만 삶의 터전인 대성동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이 전쟁의 아픈 상처는 가슴에 묻고, 불편함은 감수하면서도 DMZ 안에서의 삶을 이어온 이유이기도 하다.

 

<디펜스21+> 2014년 6월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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